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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기,일본서기,풍토기,만엽집,정창원

imaginerNZ 2007. 10. 1. 02:47
 

 

 

고사기, 일본서기, 풍토기, 만엽집, 정창원

 

고사기(712년)는 나라시대의 역사적 산물이며, 추고천황(7세기초)부터 수이코까지 다루고 있다. 일본서기는 30권으로 되어있고 순 한문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체계는 중국의 편년체를 본 따 697년 7세기말 지통천황까지 다룬 역사책이다. 일본서기는 사인천황의 명령을 받고 순 한문식으로 기록하였는데 720년에 이룩한 책으로 일본 최초의 편년체 역사서이며, 문장은 한문이고 전 30권 계도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지창조부터 수많은 신들에 의해 3천여개의 섬나라가 탄생하는 과정과 천손강림신화부터 경정저존이 구주에 내려오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고, 신무천황부터 지통천황 말년까지 (697년)역대 천황들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를 계승하여 편찬된 책은 797년 '속일본기'와 840년 '일본후기', 869년 '속일본후기' 879년 '문덕신록' 901년 '삼대신록'과 더불어 '육국사'라 부른다. (8세기초-10세기초) 신화시대부터 887년 효광천황까지를 일본 국사의 완성을 본 것이 육국사를 통해서였다. 도 하나의 나라시대의 산물로는, 풍토기를 들 수 있다. 풍토기는 713년 대화조정의 명령에 따라 일본 지방에서 만든 지명의 전설, 특산물 등을 기록한 것으로 원명천황의 명을 받들어 여러 국(도)의 토지의 상황, 산천의 명칭, 산물, 이야기 등을 보고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국에서는 이를 조사한 뒤에 보고서를 제출해서 730년말까지 대략 편집이 끝났다. 이를 만든 목적은 대화조정이 대보율령으로 형성된 율령제도가 전국에 어떻게 보급되었는지를 확인하고, 개발 가능성 있는 지역을 파악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점차 없어져서 733년에 만든 출운풍토기만 제대로 남아있다. 현존하는 풍토기로는 '비전풍토기', '풍후풍토기', '출운풍토기', '번마풍토기', '상륙풍토기'가 있는데 풍토기는 가장 오래된 인문지리서로 고사기, 일본서기와 더불어 일본 전통 문화사 연구에 중심이 된다.
문화를 보면 일본 특유의 시가 형식인 화가를 집대성한 만엽집 20권이 8세기 중엽에 편찬되었다. 만엽집은 나라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 20권이다. 편찬자는 대반가지(?)인데 확실하지 않고 전해져오고만 있다. 내용은 인덕천황부터 759년까지 장가(긴노래), 단가, 선두가를 비롯해 4516수(4616?)가 수록되어 있다. 이를 만든 작자는 황족에서부터 무명의 농민, 무사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했따. 이 시대는 신라시대로 보면 삼국 통일후인 신문왕과 효소왕때로 (7세기부터 8세기초) 신라는 문물이 창성하였고, 향가가 크게 유행하던 때였다. 일본은 천무천황과 지통천황때로서 일본도 문학이 융성하고 중국의 한시 발달하였다. 일본에서는 화가의 뛰어난 시인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신라에 대한 외교 정책도 극진하여 두 나라의 시인들의 빈번한 교류를 가져 향찰(우리말을 한자로 표음하던 -이두)이 외지에 전해졌다. 아울러 대화조정과 문단에서는 한국의 도래인들의 1세와 그 후손들에게 주도권을 쥐고, 그들의 노래를 지을 때 본국의 가락에 맞춰 부르게 된다. 그리하여 만엽집 노래 형식이 우리나라의 가요의 형태와 동질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 마엽집은 만요가라는 독특한 표기법을 쓰는데 이는 고사기에 시도된 한자의 음과 뜻으로, 일본어를 표기하는 방식이 성공적으로 사용된 예에서 채택된 것이다. 이는 신라의 이두와 비슷해서 만요가나를 고안한 사람이 향찰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이라 파악되고 있다. 나라시대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의 고대 문화는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어문학이 그러한데, 한문의 전파 이래로 귀족들 사이에서 한문학이 익숙해져서 중국의 한시를 만드는 능력을 갖춘자가 등장하였고, 구전에만 의존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문예가 문자문학으로 정착하게 되고, 한시의 영향을 받아 예술적 형태로 승화할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특히 5-8세기에 이르는 동안 한반도는 중요한 문화를 전파하고, 만엽집에 나타난 것들은 이들 문화의식의 조그만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옛부터 일본열도에 문화를 전파한 한반도 사람들은 나라시대의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고사기, 일본서기는 고대 한국을 금,은이 많은 보물의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만엽집에는 한의(한국의 옷), 고려금(고려비단)이라해서 고려의 빛깔이 아름다운 한국의 옷이나 비단을 예찬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한국을 우러러보는 반면에 야만인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눈에 띄는 이중적인 모습이 보여진다. (8세기). 이것은 한반도가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되고, 일본열도에서는 대화를 중심으로 한 통일국가가 완성이 되었는데, 이때 일본의 지배계층의 국가의식이 고양된 데서 기인한다.
나라시대의 문화는 성무천황의 연호(천평)인 천평연대에 번영해서 천평문화라고 부른다. 성무천황은 불교의 힘으로 평안과 국가번영을 위해 동대사를 건립하게되고, 이를 건립하는데 국력을 기울였다.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인 대웅전을 만들게 되고, 금당에 있는 불상은 금동으로 주조했는데 높이가 16m이고, 연인원 백 만명이 동원되었다. 대불의 길이는 16m이고, 얼굴은 약 4m이고, 세계 최대의 주존불이다. 이때 자재는 대불본체 구리와 주석이 약 250톤이고, 연좌는 130톤이며 도금의 금은 60kg, 수은 300kg,이었다. 이런 대 공사는 일본의 역량이 집중되고 천황은 호족들에게 대불 주조를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의해 전국의 지방 호족들의 도움을 받았고, 이는 이때 이미 상당한 경제력을 쌓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746년부터 752년까지 약 6년에 걸친 이 대역사는 중국, 인도, 한국 승려 만 여 명이 모였는데 일본이 이런 건축물을 지어서 화려하게 행사를 치룰 수 있는 국가가 되었음을 국내외에 선전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8세기 중엽)
752년 4월 대불 점안식에 성무 상왕, 광명 황태후, 효경천황과 승려 만 여 명과 5급이상 문무백관이 참여한 화려한 행사였다. 이때 인도의 보제승정이 점안했다. (국제성을 띔)
동대사에는 일본고대의 보고인 정창원이 있다. 나라시대의 사원이나 관청의 창고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 현재 남은 것은 동대사의 정창원이다. 이것은 삼각형의 각재를 쌓아 올려서 지은 교창 양식이다.이곳에는 수장품 보존에 적합하게 바닥이 높게 되어있고, 내부에는 북창, 중창, 남창이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특히 남창은 악기류, 동대사의 법회용품을 보관하는 천평문화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북창에는 성무천황의 유품을 가지고 있다. 중창에는 대불 점안식때  헌납품과 무기류, 문서류가 있다. 이를 세운 성무천황이 죽자, 광명 황후는 그가 애용하던 물품을 동대사에 헌납하고 기도했다. 또 보물들은 궁중이나 귀족들이 기증한 것도 수납되어 있다.  수장품의 종류는 무기류, 문방구, 악기, 놀이기구, 복식품을 비롯한 당시 최고급 미술품 이거나 각종 문서나 의약품들도 수장되어 있다. 이런것들도 나라시대의 다양한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세계적으로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당나라, 한반도, 중앙아시아, 이슬람, 인도, 그리스, 로마까지 관련된 것들도 있다. 특히, 정창원에는 신라 경덕왕 14년, 755년에 작성된 서원경 부근 네 개 촌의 생활 실태사가 담긴 장척, 민족문서가 발견되어 신라시대 백성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평안천도와 그 문화

 

나라는 794년 황무천황이 경도분지에 새로운 평안궁을 건설하면서 끝나고 이후 약 400년간을 평안시대라 한다. 대화조정은 이 시기부터 시작해서 에도시대가 끝날때까지 1100년간 도쿄에 수도가 머물러있었다. 794년에 평안경으로 옮겼을 때부터 시작해서 원뇌조가 경창막부를 열때가지 정치.문화의 중심이 평안경에 있던 400년간을 평안시대라고 한다. 대개 794년부터 1192년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솔이다. 이 평안은 새로운 수도는 영원히 번영을 누리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신찬성씨록>에는 경도주변의 명문가 천 명 중, 1/3이 도래계의 자손인 것으로 씌여져 있다.
<신찬성씨록>은 일본고대에서 근기지방(대판, 경도, 나라)의 1182개의 씨족들의 계보로서 만다친화등이 편찬해서 814년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30권으로 되어있다. 내용은 천황가에서 갈라진 씨족, 신에서 갈라진 �고, 도래인에서 갈라진 씨족들을 분류해서 시조와 같은 조상관계를 기재한 것이다. 이 책에는 평안경에 본관을 둔 174명의 성씨 중에서 백제 계통의 성씨가 60씨이고, 고구려 계통의 성씨가 24개, 신라계통은 4개씨로 반수에 가깝다고 적혀있다. 환무천황 때에는 스스로가 자기의 피에는 도래계의 피가 있음을 인식하며 도래계 씨족을 중용했고, 환무천황은 790년에 '백제의 왕은 짐의 외척이다.'라는 천명을 내렸으며, 평안경의 도읍 건설에 도래계 씨족의 협력을 받아서 조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도래계 씨족 중에는 신라계통은 진씨, 가야계통은 한씨, 고구려 계통은 고려씨가 대표적인 씨족들이었다.
진씨는 기내를 중심으로 전국각지에 분포하였고, 아야는 기내 주변에서만, 고려씨는 기내, 관동지방까지 분포하였다. 진씨는 5세기 초 경도분지를 개발하여 농업,, 양잠, 면직을 비롯한 주조, 목공을 이루어 대호족이 되었고, 씨족적 결속력이 강해 인구면에서 고대 호족 중 최대 규모였다. 한씨는 (일본인들은 백제 아직기의 아들인 동한직국의 세 아들에서 분파된 것이 아야씨라고 주장하고 있음) 진씨에 비해 선진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씨족 중에 이성이 많았던 호족으로 혈통성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