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행복으로 나아가는 몇 가지 단계
행복에는 점차로 나아가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필자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 단계를 설정해 보았다.
1. 동시대의 유행에 맞추는 데에서 얻어지는 행복이라는 이름의 만족감
2. 자신의 행복에 이르는 단계
3. 우리의 행복에 이르는 단계
4. 우리와 환경이 만나 하나가 되는 단계
5. 궁극적인 행복의 경지 -구도를 통해 깨닫는 우주심
요즈음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물질의 홍수에 휩쓸리고 있다. 물질은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로 본래 소중한 것이며 우리를 잉태하고 길러 준 어버이이기에 근본적으로 소중하다. 물질은 무수한 원소로 구성되어 있어 우열이 없이 평등하다. 원자의 집적에서 분자로 분자의 집적에서 형상을 띤 물질이 된다. 물질은 어디에나 존재하기에 흔하디 흔하며 그것은 풍요성을 띠고 있다. 현대를 사는 인간은 물질의 특성인 풍요를 개발하고 이용하고 있다. 선진화한 국가일수록 물질을 마구잡이로 쓰고 버리는 도가 심해진다.
개별물질의 고유한 특성과 형상화를 응용하여 제품화 하는 데에는 기능과 디자인이 중요하다. 최근에 와서는 기능만으로는 제 기능을 못하고 디자인이 기능을 좌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의 기술적, 예술적 창의력을 꽃 피우는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또한 판매를 좌우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디자인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의식주에서 온갖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호화로운 사치품일수록 디자인은 우리의 소유욕과 소비욕 뿐만 아니라 허영심까지 한껏 조장하고 강화시키고 있다. 그럴수록 디자인은 정교한 실용적 예술성을 발휘한다.
요즘 우리는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인간과 로봇을 지배하는 것도 디자인이다. 인간이 디자인하든 로봇이 디자인하든 양자 다 디자인에 골몰하면서 밤낮을 보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디자인은 하나의 거대한 정신의 흐름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는 물질만능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점을 달리 말하면 디자인 만능시대에 살고 있다. 요즘은 제품화가 기능우선주의에서 디자인중심주의로 급격히 사고가 옮아가고 있다. 즉 실용적 기능성이 디자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디자인은 효율적 기능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미학적인 고려가 추가된다. 즉 제품을 미학화하는 역할까지 디자인이 떠맡고 있다. 디자인을 거쳐서 제품은 단순한 물건 이상의 것이 된다. 그 제품은 인간의 정서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우리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능동적으로 고르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이고 매력 있는 디자인이 간접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선택하는 도가 가속화될 것이다. 우리가 디자인을 거부할 수 없는 아유는 단순하다. 디자인은 우리의 정서에 거부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훌륭하게 디자인된 제품은 극적인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구매의욕을 가진 사람에게 최초의 예술적 창조의 완성과 희열감을 첫 눈에 느끼게 해준다. 요즘은 제품들이 인간에게 말을 건다. '나만의 이런 정확하고 세밀한 기능적 특징에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형태와 색체의 배합을 당신은 본 적이 있나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여 취하지 않고는 못 배길꺼예요!' . 혹은 거의 명령투로 '넌 날 선택해야 해! 다른 대안은 없어.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에요.' 등등.
우리는 상품화된 디자인에 선택 당하면서 그것을 구입한다. 그것은 유행성을 띤다. 특히나 젊은이들은 유행에 민감하다. 유행을 쫓으며 느끼는 감정은 물질적인 자기만족이며 자기만족은 자아의 대리만족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느낌에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행복하다고 말하거나 느끼는 이러한 감정이 진정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유행에 기대는 어리숙한 행복감이다. 그 감정은 짧고 변덕스럽다. 지금 당장의 만족감이 내일은 버려진다. 행복의 요소에 짧거나 변덕스러움은 없다. 행복은 어느 한 요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그 행복에 잠기면서도 행복을 전체로 바라보며 동시에 느끼고 비로소 거기에 온전히 동화 되어 잠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하나의 전체이며 거기에 잠기는 것이다. 이 때의 느낌이 바로 행복감이다. 행복은 마음의 감(感)이다. 그러니 디자인이 낳는 물질의 유행은 행복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대리만족이나 우연한 충족감에 불과한 것이지 진정한 행복은 아니다.
더 우려할만한 점은 인간의 물질화, 조건화이다. 친구를 사귀거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물질화, 조건화된 안목으로 바라보고 판단하고 선택한다. 인간은 물질화에 젖어들 수 있으나 마음은 물질이 아니다. 마음만이 행복을 낳을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물질에 뒤덮인 생활을 할지라도 먼저 마음을 아끼고 가꾸고 중시하는 태도를 갖추고 산다면 마음이 물질에 미혹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사랑을 지향한다. 마음이 제 품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사랑을 낳을 때 그 사랑이 행복의 첫 관문이자 유일한 전제조건이 된다. 사랑은 마음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물질이 디자인을 낳고 디자인은 유행을 낳고 유행은 유행심리를 양산한다. 그것은 병든 마음의 전염병이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무상한 욕구의 풍요를 낳으며 욕구는 자극에 예민한 반응성이며 끝이 없다.
그러니 그대가 행복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물질의 풍요에서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마음의 풍요로 복귀하라. 일단 물질에 대한 생각을 버려라. 돈을 버려라. 그리고 명예와 권세를 버려라. 그러면 그대의 물질이 가득 채웠던 마음의 빈 자리에 생각이 둥지를 틀고 거기에 느낌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대가 목이 말라서 찾아 헤매는 옹달샘은 그대 안에 있다. 그것이 마음이다. 그리고 자문하라.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고. 그답은 자명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에 잠겨라. 그것이 참인생을 사는 첫 단추이자 유일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복잡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길섶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한 송이 들꽃이나 저 푸른 하늘을 가르는 한 마리 새처럼 자연스럽고 소박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 점이 마음의 특성이자 전부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인’이 된다면 일회용 소모품도 반영구적으로 쓰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물질을 고마워하고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게 된 마음 덕분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것도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행복의 몇 가지 단계에 대해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로, 동시대의 짧고 변덕스런 유행의 만족감에서 먼저 벗어나 참마음을 다시 발견하라.
둘째로, 스스로에게 ‘나는 진정 행복한 사람인가?’ 라는 물음을 되풀이하여 물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찾아 회복시켜라. 그 길만이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며 자신을 진정 사랑하게 되면 거기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생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찾아 거기에 잠겨라. 이 것이 진정한 행복의 첫 단계이다.
셋째로, 자신을 사랑할수록 겸손해지며 겸허히 자기를 낮추는 사람의 눈에 접하는 모든 대상이 신선하고 소중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의 마음이 함께 형성된다. 그것은 사회적 지위와 신분, 빈부귀천을 떠나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희노애락의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과 인간적인 점 외에 그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한 끼만 굶어도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서로에게 보편적인 동정심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자신만의 입장과 처지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남의 딱한 처지와 걱정과 고난과 아픔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능력껏 도움을 자청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우리’의식이 굳건해지며 그런 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는 아름다운 인간의 정이 통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다른 집단이나 사회를 배제하거나 물리력인 해결을 앞세워 다른 사회를 침탈하지 않고 대화를 중시하는 열린 사회들이 많을수록 이 지구촌은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결국 우리인 것이다.
넷째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말은 인간중심적이고 인간의 자연지배적인 세계관이다. 이 세상은 인간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은 기껏해야 어머니 대자연의 한 자손에 불과하다. 어머니 대자연은 생명 있는 것들과 생명 없는 것들을 동시에 품어 안아 돌보고 있다. 인간의 가장 큰 맹점은 인간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이 세계는 결코 인간중심적인 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의 삼라만상은 모두 평등한 구성원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이 세계의 운명에 대해 이 모두가 한 표씩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어느 한 구성원의 장기집권을 원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장기집권의 특권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중심적인 지배권의 확립은 일종의 독재인 것이다. 영구적인 독재시대는 없다. 독재자가 사라지면 평화는 찾아오게 마련이다. 모든 구성원이 반기를 들면 독재자는 백기를 들고 민의에 항복하거나 자멸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며 또한 자연의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이 세계의 개개 구성원에 대한 민의의 수렴절차가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이다. 인간이라는 권력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자연구성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극적인 변화가 없는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 나와 나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합일하여 우리가 속한 우주를 구성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 우리는 함께 해야 할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깨닫고 실행할 때 자연은 본래 소박함을 되찾을 수 있다. 자연의 기운은 소박성이다. 그 소박한 자연 안에서 인간이 실현해야 할 것은 소박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질의 풍요만으로 모든 것을 가름하는 과욕의 시대는 사라져야 한다. 자연에 순응하는 것만이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질서에 맞춰 사는 지혜가 모든 인류에게 참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물질의 풍요를 통한 행복은 행복이 아니며 자연의 행복을 헤치는 이기적인 자족감에 불과하다. 그러니 자연의 뼈와 살과 피로 만들어진 모든 인공의 것들을 가급적 아끼고 소중히 여겨라. 그것이 조금이라도 자연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길이다. 그 첫걸음은 아마도 종이를 아끼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면 적어도 어젯밤보다는 자연과 함께 오늘밤에 좀더 편한 잠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로, 더 나아가 우리가 속한 광막한 우주에 대해 우리가 구도를 통해 우주의 마음을 이해하고 느끼고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길, 즉 ‘깨달음(득도)’이다. 깨달음은 마음이 우주에 동화가 되어 이루어지는 ‘우주심’이다. 쉽게 말해 전체와 하나가 되면 부분은 분리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에는 어떤 대립이나 반목이나 갈등이나 투쟁은 없다. 이 것 역시 하나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몸은 유한하나 마음은 우주에 닿아 스미는 합일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매사에 겸손하고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궁극적으로 우주를 깨닫고 하나를 그리워하라. 인간의 궁극적 감성은 그리움이어 그럴 수밖에 없으니 모두가 함께 그럴 수 있기를 간구한다. 이 우주심을 득하는 것이 궁극적인 행복의 경지이다.
[8:20pm, 3/01(Wed),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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