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하는 삶/구도행

가수 김 장훈 -아름다운 삶(2)

imaginerNZ 2008. 2. 22. 19:08

빨간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는 ‘평범한’ 검은 머리에 캐주얼 양복을 입고 약속 장소로 들어섰다. 가수 김장훈.1991년에 데뷔해 9집 앨범까지 낸 그는 별종이다. 치마를 입고 공연을 하고, 도대체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도 입을 것 같지 않은빨간색이나 보라색 ‘롱 코트’를 한여름에도 입고 다니던 남자다. 그는 얼마 전 의류회사와 광고 계약을 하면서 받게 된 모델료1억원을 ‘반크(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에 기부했다. ‘반크’는 한국의 이미지를 바르게홍보하자는 취지에서 지난 1999년 출범한 사이버 민간외교사절단이다. 얼마 전에는 30억원을 기부했다는 말도 있었다.
―30억원을 기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던 지난 4월에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더니 이번에는 왜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나요?

“그때 방송에 출연했던 이유는 ‘행복이란 게 절대 물질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였죠. 그런데, 당시 분위기가 마치제가 선행 이미지를 홍보에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자꾸 그런 쪽으로 흘러가면 제 노래를 하는데도영향이 있을 것 같아서 인터뷰를 피했어요. 이번에 의류회사와 광고 모델 계약을 맺었는데, 모델료 1억원을 반크에 기부를 하기로했습니다. 전 반크 회원들이야말로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외교관들이 못 하는 일들을 이들이 하잖아요.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있죠. 뭐, 주위에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일본×들은 개××들’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많은데, 직접 거기에 대응하는 행동을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직접 행동을 해요. 저는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반크 활동만큼 좋은 게 없다고생각합니다.”

김장훈은 열변을 토했다. 그는 지난 2004년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에 항의하는 의미에서‘살수대첩’이라는 콘서트를 열었다. 작년에는 고이즈미 전 일본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 왜곡을 비난하는 뜻에서‘故이즈미를 생각해본다’, ‘고이 자미 드소서’라고 적힌 ‘패러디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다.


―연예인인데 왜 그렇게 역사에 집착을 하나요? 극단적인 상업주의라는 비난도 있는데….

“저는 개인이나, 국가나 힘 있다고 약한 쪽을 괴롭히고 누르는 건 못 참겠어요. 그런데, 일본이나 중국은 자기들이 힘 좀 세다고우리를 무시하고, 막 하는 거 아닙니까.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나서야 합니다. 저는 가수이니깐 제 방식으로 대응하는거죠.”

―다시 기부 얘기 좀 하죠. 30억원을 기부했다는데, 믿기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사실 제가 낸 돈을 계산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방송국 요청으로 처음 계산해 봤죠.”

―정말 매달 1500만원씩 기부를 했나요?

“아 그건 ‘30억원이면 매달 1500만원, 하루에 50만원 꼴이구나’ 하고 방송국측에서 계산한 겁니다. 제 직업이 가수죠. 매달 고정 수입이 아니고, 불규칙적이거든요.”

김장훈은 서울 마포구의 30평짜리 아파트에 혼자 산다. 보증금 5000만원은 소속사 사장한테 빌려서 냈고, 월세 120만원만자신이 낸다. 소속사 하늘소의 노민호 대표는 “김장훈씨는 지갑이 아예 없다”며 “그저 주머니에 돈 몇 만원만 쑤셔 넣고다닌다”고 했다. 아무리 사람이 돈 욕심이 없을까 싶어 다시 물었다.

―기부를 그렇게 많이 하는데 정말 아깝지 않습니까?

“네.안 아깝습니다. 제 통장에는 아마 몇십 만원 정도 있을 겁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건 궁극적으로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하는 겁니다. 기부도 마찬가지고, 노래도 똑같죠. 내가 기부해서 다른 사람이 행복해 하는 걸 보면 나도 행복해집니다. 내 노래를듣고 즐거워하는 팬들을 보면 내가 즐거운 거죠.”

―어떤 이들을 도와줬습니까?

“부천에 있는 ‘새소망의 집’이라는 아동복지시설을 돕고 있죠. 저도 얼마를 냈는지 몰라서 여쭤봤더니, 제가 1년에 5000만~7000만원 정도낸다고 하시더군요. 다른 시설 몇 군데에도 공연 수익금 등을 보내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후원을 하는 동생(그는 자신의 도움을받는 아이를 ‘동생’이라고 불렀다.)들도 있습니다. 5년 전 알게 된 초등학교 5학년 녀석이 있는데, 1년에 생활비로700만원을 대 주죠. 그리고,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 진학하면 쓰라고 3000만원을 만들어놨어요. 물론 그 녀석은 누가 돈을주는 지는 몰라요. 2001년에는 목사이신 어머님이 일산에 청소년들을 위한 십대교회를 만드실 때 12억원을 냈어요. 당시음반회사와 계약하면서 9억원짜리 ‘한 장’을 받았죠. 거기에 개인적으로 3억원을 보태서 냈어요. ‘교회’도 개인의 것이 되어서는안 된다는 생각에 재단 형식으로 만들었어요.”

김장훈은 도대체 얼마나 버는지, 어떻게 30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할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의 소속사는 “각종 광고와 음반 수입 말고도 공연과 행사 수입이 많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김장훈은 대학 축제 ‘섭외 1순위’로 꼽히는 가수다. 한 달에 70개가 넘는 행사를 소화한 적도 있다. 한 시즌에 행사 수입만2억원까지 번 적도 있다고 했다.

―돈을 턱턱 쓰는 걸 보면 유복한 가정 출신인가 봅니다.

“전아버지가 없습니다. 광산업을 하시던 어머님 사업이 잘될 때는 사립초등학교에 다녔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사업에 실패하시면서3번이나 살림살이에 ‘빨간 딱지’들이 붙었죠. 경기도 원당의 야산 약수터 올라가는 곳에 8만원짜리 월세에 살기도 했어요.어머님이 매직으로 ‘김장훈’이라고 적어 문패 대신 달아 놓았던 기억이 나요. 어머님은 청소년 사역을 하는 전도사를 거쳐 목사가되셨죠.”

―청소년 시절이 평탄하지만은 않았겠네요.

“초등학교 때는 몸이 약했어요. 천식이 너무 심해서초등학교 1~3학년 동안은 거의 병원 신세였어요. 6개월 동안 입원했다가 학교에 하루 다녀오는 길에 쓰러지고…. 병원에 있는동안 놀아줄 사람이 없어서 혼자 바둑을 뒀더니 바둑 실력만 늘었죠. 지금은 아마 5단이죠.

중학교 때부터는 어머니사업이 망하면서 방황을 많이 했어요. 달리는 차에 뛰어들기도 하고, 수면제를 200알이나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죠. 그냥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꼈어요. 가출을 해서 사나흘 굶어본 적도 있고, 다른 학생들 돈을 빼앗아 보기도 했어요. 결국 고등학교 때‘사고’치고 학교에서 잘렸죠. 중국집에서 싸움이 나서 경찰이 왔는데, 그게 등록금을 걸고 ‘학교 대항’ 도박을 하다가 벌어진싸움이라 일이 커졌어요.”


▲ 아동보육시설인 '새소망의 집' 동생들과 함께 놀이동산을 찾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 김장훈. /새소망의 집 제공

―누구나 겪는 학창시절의 가벼운 일탈 수준은 넘는군요.

“제가 청소년 시기에 방황을 해봤기 때문에 가출청소년 상담을 위한 ‘꾸미루미(꿈을 이룬다는 뜻)’라는 버스 운영을 지원하고 있는겁니다. 가출 청소년들은 대부분 부모들이 문제가 있는 경우이지요. 제가 이 친구들과 상담할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해줘요. ‘지금우리의 현실도 감당하기 힘든 데 어른들까지 신경 쓸 일이 뭐가 있느냐. 너희 부모들이 그렇게 된 것은 죄가 아니다. 부모들도굉장히 미안해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엇나가지는 말아라’라고 말이죠.

저는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친구들과 음악서클을 만들어서 함께 기타치고 노래했어요. 어, 그런데 어느 날 목소리가 안 나오더군요. 소리만 지를 수 있게 해달라고기도했죠. 나중에 가수가 되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두 가지 조건을 내거셨어요. ‘교회에 다녀라’, ‘대학에 가라’ 이거였죠.그래서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엘 갔어요.”

―대학에선 공부를 좀 했나요?

“음악 서클에 들어가서노래만 하면서 살았어요. 어느 해 여름인가는 한달 동안 매일 19시간씩 노래 연습만 했죠. 1시간 연습하고 ‘正’자를 써가는식으로 표시를 하면서 했어요. 노래에 미쳐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1991년에 데뷔를 했습니다.”

―고 김현식씨와 목소리가 너무 흡사한데다가 사촌 동생이라고 했었죠?

사실 현식이 형이랑은 친척이 아닙니다. 원래 어머님끼리 친한 사이였고, 저희 어머님 사업이 망했을 때 갈 곳이 없어서 그 집에 가있는 경우가 많았죠. 형제처럼 친했어요. 나중에 가수가 되니까, 현식이 형이 ‘내 사촌 동생인데 노래를 잘한다’고 소개하면서그렇게 된 겁니다. 형이 죽고 나서 사람들이 자꾸 그 얘길 하는 게 싫었어요. 마치 제가 형의 죽음을 발판으로 크는 것처럼느껴졌거든요. 물론 형은 제 가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지요. 요즘은 형이 잊혀지는 것 같아서 무대에서 형 노래를많이 부릅니다.”

―공연에서 150m쯤 되는 무대를 뛰어다니면서 노래를 하기도 하는데, 운동 많이 해야겠어요.

“유일한 운동이 연습실에서 노래 연습하는 거예요. 연습하는 내내 뛰면서 연습을 하죠. 아마 황영조 선수보고 뛰면서 노래하고 해도 ‘헉헉’댈 겁니다.”

―공연에서 와이어(wire)에 매달려 노래하다가 떨어진 적이 있죠?

“500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공연을 할 때였는데, 2층에 계시는 분들은 소외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내가 팬들에게 가까이 가야겠구나’라고 생각했죠. 극장 주인을 설득해서 벽을 뚫고 고정장치를 박고, 와이어를 연결해서 팬들에게날아갔어요. 그 때 팬들의 기뻐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2002년에 한 공연에서 와이어에 매달려있다가 7m 높이에서 떨어져서 어깨뼈가 박살 났죠. 사고 뒤로 겁이 나서 3년 반 동안 와이어를 못했어요. 하지만 다시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 소녀 팬의 편지 때문이었어요. 자살을 생각하던 그 소녀는 저에게 ‘어린 시절을 병실에서 보냈던 사람이하늘을 날고 있으니 정말 좋겠다’며 자신도 용기를 내서 다시 날겠다고 했어요.”

―가수로 살아오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는 언제입니까?

“2002년이었어요. 내 노래가 더 이상 나를 못 울리는 것 같다는 좌절감이 들었어요. ‘등 따시고 배부르니까’ 예전 같은 노래가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게 심해지니깐 공황증(恐惶症·panic disorder)이 되더군요. 모든 게 멈춰서 숨 막혀 죽을것처럼 되는 거예요. 병원에서 치료까지 받았어요.”

그의 ‘방송용’ 나이는 마흔. 김장훈은 “나이를 이야기하는 것도 사회적인 틀에 끼워 맞추는 것 같아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김장훈은 1965년생’이라는 글이 적지 않게 올라 있었다.

―새카만 후배가수들과 함께 10대 취향의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는 게 어색하지 않나요?

“앞으로도 가요무대 같은 프로엔 안 나갈 겁니다. 아직도 10대 취향 프로에 나가는 게 자연스러워요. 거기 나가도 관객들은 아이돌스타한테 더 많은 박수와 환호를 보내죠. 전 신경 안 써요. 제가 그 프로에 나가는 거는 담당 PD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나올만하니까 나오라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틀이라는 것을 굉장히 많이 강조하는 것 같아요. 저는 자유로워야 더 행복할수 있다고 믿어요. 제 공연에 오시는 팬들을 보면 10대 초반의 청소년부터 60대 어르신까지 정말 다양합니다. 힘이 있는 한지금 스타일로 무대에서 뛰어다니고, 발차기를 하면서 노래할 겁니다. 물론 변화는 시도합니다. 이번 가을에는 트로트에 도전합니다.그게 그냥 트로트가 아닙니다. 에픽하이의 타블로가 작곡하는 트로트입니다.”

―결혼을 안 하니까 이상한 소문까지 나던데.

“결혼을 못하는 건 노래 때문입니다. 제 노래가 다 이별의 아픔, 이루지 못하는 사랑의 아픔에 대한 거죠. 그런데 제가 결혼을 해서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그런 노래들을 부르면, 그 사람은 뭐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연애를 해도 항상 다른 생각을 하고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여자들이 금방 떠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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