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하는 삶/구도행

침묵의 세계

imaginerNZ 2008. 1. 14. 17:08

 

 

 

 

 

 

침묵의 세계Die Welt Des Schweigens 

 
                                                             막스 피카르트 (Max Picard)                               Lingua Fundamentum sancti silentii. ;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 - Maria-Culm 사원 제단에 새겨진 글 ('괴테의 일기'에서)    1.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침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침묵은 모든 것이 아직도 정지해 있는 존재였던 저 태초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침묵은 창조되지 않은 채 영속하는 존재이다.
 침묵이 존재할 때에는 그때까지 침묵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침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침묵에 의해서 관찰 당한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한다. 인간은 침묵을 시험하지 않지만,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
 오직 말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지만, 오직 침묵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아마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침묵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완전하게 현존하며 자신이 나타나는 공간을 언제나 완전하게 가득 채운다.
 침묵은 발전되지 않는다. 침묵은 시간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침묵 속에서 성장한다. 마치 시간이라는 씨앗이 침묵 속에 뿌려져 침묵 속에서 싹터 나오는 것 같다. 침묵은 시간이 성숙하게 될 토양이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현존한다. 침묵은 그 어느 먼 곳까지라도 뻗어가지만, 우리에게 가까이, 우리 자신의 몸처럼 느낄 정도로 가까이 있다. 침묵은 잡을 수는 없지만, 옷감 마냥, 직물 마냥 직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침묵은 언어로써 규정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이며 분명한 것이다.
 멂과 가까움, 멀리 있음과 지금 여기 있음 그리고 특수한 보편이 그처럼 한 통일체 속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침묵 말고는 다른 어떤 현상에도 없다.     
 2. 

 

 침묵은 오늘날 유일하게도 아무런 효용성이 없는 현상이다. 침묵은 오늘날의 효용의 세계와는 맞지 않는다. 침묵은 다만 존재할 뿐 아무런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침묵은 이용할 수가 없다.
 다른 큰 현상들 모두가 효용의 세계에 병합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마저도 비행기들이 다니는 데에 소용이 되는 하나의 밝은 갱도 같은 것일 뿐이다. 물과 불, 그 원소들도 효용의 세계에 흡수되었고, 그리하여 그것들은 단지 이 효용의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한에서만 인식될 뿐이다. 그것들은 더 이상 독자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침묵은 효용의 세계 외부에 위치한다. 침묵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침묵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침묵은 비생산적이다. 그 때문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모든 것들보다는 침묵에서 더 많은 도움과 치유력이 나온다. 무목적적인 침묵은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인 것의 곁에 있다. 그 무목적적인 것이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인 것 곁에 갑자기 나타나서, 그 무목적성으로써 놀라게 만들고 목적 지향적인 것의 흐름을 중단시킨다. 그것은 사물들 속에 들어 있는 만질
 수 없는 어떤 것을 강력하게 만들어주며, 사물들이 이용당함으로써 입게 되는 손실을 줄여준다. 그것은 사물들을 분열된 효용의 세계로부터 온전한 현존재의 세계로 되돌려 보냄으로써 사물들을 다시금 온전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사물들에게 성스러운 무효용성을 준다. 왜냐하면 침묵 자체가 무효용성, 성스러운 무효용성이기 때문이다.

 

                  말은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 그 충만함은 말 속으로 흘러나오지 못할 때는 그 자체로 인하여 터져 버리고 말 것이다.
 침묵으로부터 발생하는 말은 어떤 위임에 의해서 존재한다. 말은 그 이전의 선행한 침묵을 통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신이지만, 침묵이 말에 선행했다는 것이 바로 정신이 창조적 작용을 한다는 표시이다. 즉 말을 배태한 침묵으로부터 정신이 말을 끌어 내오는 것이다.
 인간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언제나 말은 다시금 침묵으로부터 탄생한다. 말은 그렇게 당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침묵으로부터 탄생한다. 마치 말이란 다만 침묵을 뒤집어 놓은 것. 즉 침묵의 이면일 뿐이라는 것처럼. 그리고 사실상 - 그것 침묵의 이면 - 이 말인 것이다. 말의 이면이 침묵인 것처럼.
 어느 말 속에든, 그 말이 어디서 왔는가를 보여주는 한 표시로서 어떤 침묵하는 것이 들어 있고, 또한 어떤 침묵 속에서든 침묵으로부터 이야기가 생긴다는 한 표시로서 어떤 이야기하는 것이 들어있다.
 따라서 말은 본질적으로 침묵과 연관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그는 말이 이제야 침묵이 아니라 인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을 그는 다른 사람이라는 대자對者를 통해 체험한다. 대자를 통해서 처음으로 말은 이제는 침묵이 아니라 완전히 인간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에는 언제나 제 3자가 있다. 즉 침묵이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말들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좁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들이 먼 곳으로부터, 침묵이 귀기울이고 있는 그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그 대화를 폭넓게 만들어주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말은 더 한층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말하자면 말들은 침묵으로부터, 즉 저 제 3자로부터 이야기되고, 그리하여 화자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듣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그러한 대화에서 제3의 화자는 침묵이다. 플라톤의 <대화>의 끝 부분에는 언제나 침묵 자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 속에서 그때까지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침묵의 경청자가 되는 것이다.
 3. 불확실하고 멀리까지 미치며 역사 이전적인 침묵으로부터 분명하고 한계가 있고 철저히 지금 여기 있는 것인 말이 생겼다.
 침묵은 이름할 수 없는 천 가지의 형상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소리 없이 열리는 아침 속에, 소리 없이 하늘로 뻗어있는 나무들 속에, 남 몰래 이루어지는 밤의 하강 속에, 말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 침묵의 비처럼 밤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달빛 속에,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의 침묵 속에, 이러한 침묵의 형상들에게는 말이 없다. 그럴수록 이 이름 없는 것들로부터 대립물로서 생기는 말은 더 한층 분명해지고 확실해진다.
 침묵의 자연 세계보다 더 큰 자연세계는 없다. 그리고 그 침묵의 자연 세계로부터 형성되는 언어의 정신세계보다 더 큰 정신세계는 없다.
 침묵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고, 침묵의 세계성에서 말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세계로 형성하는 법을 배운다. 침묵의 세계와 말의 세계는 서로 마주해 있다.
 따라서 말은 침묵과 대립돼 있다. 그러나 적대 관계 속에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은 다만 침묵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 인간은 말을 통해 침묵을 듣는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인 것이다.
  4.
 
음악의 소리는 말의 소리처럼 침묵에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평행한다.
 음악의 소리는 침묵 위를 흘러가듯이 침묵에 떠밀려 표면 위로 나오는 것이다.
 음악은 꿈꾸면서 소리내기 시작하는 침묵이다.
 음악의 마지막 소리가 사라졌을 때보다 침묵이 더 잘 들릴 때는 없을 것이다.
 음악은 멀리까지 미치고 그리고 단번에 전 공간을 점령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음악은 느릿느릿 수줍게 리듬을 통해 공간을 차지하고, 언제나 다시 같은 멜로디로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음악의 소리는 마치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고, 도처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정된 한 장소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것, 즉 공간적인 멂과 가까움, 무한한 것과 한계 지워진 것이 음악을 통해서 가장 부드럽게 병존하고 있다는 것이 영혼에게는 하나의 은총이다. 음악 속에서 영혼은 멀리까지 떠돌 수 있고 그러면서도 그 어디에서나 보호받고 안전하게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음악이 신경질적인 사람들에게 진정 작용을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영혼에게 어떤 넓이를 주고 그 안에서 영혼은 불안감 없이 있을 것이다.
 5.  언어는 침묵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진리는 언어로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묵 속에도 역시 진리가 있다. 하지만 진리가 침묵 속에 있는 것은 존재의 일반적인 질서 속에 있는 진리에 침묵이 참여하는 한에서 만이다.
 침묵 속에 있는 진리는 소극적이고 잠자는 상태지만 언어 속에서는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또한 언어 속에서는 진리와 오류에 대해서 적극적인 결단이 내려져 있다. 언어는 그 본질상 스스로는 잠시 지속한다. 마치 침묵의 연속이 단절된 것 같다.
 침묵에게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진리이다. 진리는 침묵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세계가 되게 한다. 그것은 언어가 간과할 수 없는 진리로부터 연속성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언어가 흘러나온 침묵은 이제 진리를 둘러쌓고 있는 신비로 바뀐다. 진리가 아니면 언어는 침묵에 떠있는 언어의 안개에 불과할 것이다. 진리가 없다면 언어는 희미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붕괴되고 말 것이다. 언어를 분명하고 확고하게 하는 것은 바로 진리인 것이다.     
 언어 역시 세계이다. 단순히 어떤 한 세계에 딸린 부속물이 결코 아니다. 언어는 모든 목적성을 초월하는 충만감을 지니고 있다. 언어에는 단순히 의사소통에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이 있다.  
 언어는 물론 인간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또한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 언어 속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끌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과 기쁨과 슬픔이 있다. 언어는 마치 인간과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고통과 슬픔과 환희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언어는 때로는 그 자체에 알맞은 시를 창조하는데 그것은 온전히 그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