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수상록·에쎄이

종교간의 화합과 종교적 진실

imaginerNZ 2007. 9. 26. 17:39

첫째, 회개가 기독교를 파먹고 있다. 

주중에는 하고 싶은 바를 행하고

주말에 교회에 가서 회개를 하고

발걸음 가볍게 면죄의 교회밖으로 걸어나오는

많은 신자들을 나는 세간에서 목격했다. 

이 점이 현대기독교가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가장 큰 과제임은 진실이다.

이러한 점의 해결의지 없이

기독교가 타 종교와의 화합을 추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기독교도들의 문제점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비기독교도들과 비종교인들을

맹목적으로 이단시하여 우리만의 울타리 의식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이다.

어떤 종교에서 '너희들'와 '우리들'을 구분하는 것은 유일신 사상의 맹목성에서 비롯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조상과 뿌리는 같다.

 코란에 나오는 창세기의 내용과 성경의 구약은 같고 '하나님'도 같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나 제자가 누군가에 따라 다른 종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유일신 사상이기에

역사적으로 끝없는 반목과 전쟁을 치렀고 지금도 그러하다.

유일신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이교배척 정신은

역사상 평화와 화합이 아니라 갈등과 전쟁에 수렴했고

현대의 세계정치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할 권리가 없으며

부시가 주장하는 신성한 전쟁은

십자군 전쟁의 구호가 오늘날에도 통한다는 점과

정치적 야욕이 종교와 결합했을 때 어떤 비극을 부르는가 하는 점을

백일하에 논증하고 있다.

원래 '신성한 전쟁'이란 성립되지 않는다.  

 

셋째, 기독교의 전파방식이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종교를 전파할 때

사람들에게 원죄의식을 강요하고 천당과 지옥을 묘사하며

선과 악 중에 택일을 요구한다.

기독교 비신자는 무지몽매한 악이고 기독교 신자는 영원한 선에 든다라는 믿음은

매우 일방논리적이며 일방논리는 비논리적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진정한  판단을 통한 믿음을 흐리게 한다.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참심성으로 교화에 젖어들게 하는 것이 종교의 전파방식이고

그것은 종교적으로 지순한 사명감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당신은 원죄인이니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라는 말의 이면에는

'당신은 우리처럼 영원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말을 사방에 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바른 지혜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넷째, 기독교는 역사상 다른 민족들과 다른 종교인들에게 가한 

무수한 악행에 대해 진실한 반성을 능동적으로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바티칸 당국도 100% 결자해지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지 못하다.

현재의 교황이 간접적으로 이슬람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는 것 역시 옳지 못하다.

영국은 아직도 노예무역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반성하지 않았다. 

기독교에서 구교와 신교의 중대한 차이점은 구교에서 일생을 신에게 바친

수도사(신부)와 수녀의 사회에 '묵상'의 기도와 수행방식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기독교에는 일말의 희망이자 빛일 수 있다.

과문한 필자가 개인적으로 접해 본 몇 분 수녀님에게서 묵상에서 우러나오는 태도,

인류의 화합을 기원하는 마음자세를 읽을 수 있었다.

미국의 몇몇 카톨릭 수도회에서 불교의 대덕고승을 초빙하여

참선과 명상법에 대한 가르침을 배운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이점은 종교간 화합의 가능성을 구현하는데에 역사적으로 진일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님은 오래전에 이미 열린 말씀을 남김없이 하셨다. 

 

마지막으로,

'종교는 무엇에 씌운 채 믿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우러나오는 마음, 진정한 깨달음을 향하며 모두와 더불어 화합하는 마음'에서 믿는 것이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이자 믿음이다.

거기에서 종교간의 화합이 태동한다.

(200709260811 엘리엇 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