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행-4
우리는 살아 있다.
우리는 한 번 살고 있다.
한 번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아쉬움, 소중함, 희망, 죽음, 허심, 초월, 등등...
그러나 하나의 개체로서 전체인 삶 앞에서 보통 사람이 후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후회는 삶의 자취에서 풍기는 내음 같은 감정이다.
살아온 나날에 대해 후회를 하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다.
후회하는 사람의 유형은 대체로 감정과 분위기에 따라
섣불리 결론을 예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우이다.
후회는 참삶의 감정은 아니다.
자신의 미래를 하나의 전체로 온화하게 설계하는 사람은 거의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가 삶을 영위하면서 어떤 것을 전제해야 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이 의문은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에 노력하는 삶에게 그에 맞는 해답을 줄 수 있다.
한편, '왜 사는가?'라는 의문은
우리에게 부여된 삶의 범위가 극히 짧고 비좁다는 점을 느끼게 하는 우주를 향해 내뱉는 질문이다.
물론 거기에 해답은 없다.
그것은 해답이 주어질 수 없기에 차라리 공허한 진여의 의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왜 사는가?'라는 의문을 통해 삶의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삶의 가능성보다도 삶의 한계를 더 크게 느껴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심정에서 우러나온다.
삶의 실상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웬만하면 누구나 깨닫게 마련이다.
삶의 과정은 의외로 단조롭다.
삶의 과정이 복잡하고 다양하며 모험적이고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삶의 가능성에 기울어 있어서 삶을 하나의 큰 테두리로 보지 못하거나
삶의 한계성을 간과하거나 간과하려 하는 경향을 띨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현세적인 편향성이다.
그러면 삶의 한계를 일찌기 절감한 사람들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을까?
그것은 삶의 테두리 내에 속한 영역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봉우리,
즉 어떤 경지에서 삶 전체를 하나로 보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종교인의 길을 가는 것이다.
종교인들은 교와 파를 달리함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종교인들은 좁쌀의 차이점과 붕새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 공통점은 수행에서 비롯하여 우주자연과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그 길은 결국 구도의 길로 나 있고
결국, 그곳에 이르러 돌아서서
그곳을 이곳에서 실현하려는 마음의 태도로
이곳에서 그곳을 오로지 지향하며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다하기까지
끊임없이 스스로 깨닫고 나아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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