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언어·인류학 관련

백제어와 신라어의 차이

imaginerNZ 2008. 7. 5. 00:51
백제어는 부여계, 신라어는 한(韓)계…

7세기 동안 각각 변천해 의사소통 어려웠을 듯

황산벌은 서기 660년에 백제와 신라가 싸운 결전장이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과 신라군은 어떤 언어를 썼을까? 동일한 언어였을까 아니면 다른 언어였을까? 최근 개봉을 앞둔 영화 ‘황산벌’에서 백제군은 호남 사투리, 신라군은 영남 사투리를 코믹하게 사용해 극중 재미를 더해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 어느 누구도 확답할 수 없다.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간 1343년 전의 옛말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말은 이미 사라졌고 그때의 언어에 관한 아무런 기록도 남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당시의 언어 상황에 관한 단편적 지식들을 옛 문헌에서 찾아내 추측할 수밖에 없다.

고대 남만주와 한반도에는 어떤 언어들이 분포하고 있었을까? 이 막연한 질문에 대해 학자들은 “한반도 중부 이북에서는 부여(扶餘)계어가 쓰였고, 그 이남에서는 한(韓)계어가 쓰였다”고 추정한다. 이 통설을 근거로 부여ㆍ고구려ㆍ옥저ㆍ예맥의 언어를 부여계어군으로, 신라ㆍ가야ㆍ백제의 언어를 한계어군으로 분류한다.

이 학설은 백제어와 신라어를 동일 기원으로 묶어놓고 있다. 그리하여 필연코 두 언어의 동일 기원이 내내 동질성을 견지(堅持)하게 만든 기틀이었음을 믿도록 한다. 그러나 이는 마한의 터전에 백제가 건국한 것으로 잘못 추정한 데서 비롯된 착각이다.

이 착각은 마침내 백제어가 마한어를 승계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백제어는 한계어가 아닌 부여계어에서 출발했다. 마한은 근초고왕(346~374)이 흡수할 때까지 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기 이전의 백제는 한계어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백제 시조 온조와 그의 형 비류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로 부여계어를 사용했다. 그들과 함께 남하한 일행도 부여계어를 썼다. 그들은 언어 소통이 가능한 부여계어 지역에 나라를 세웠다. 그들이 세운 초기 국호인 위례홀과 미추홀의 ‘홀(忽)’이 그 증거가 된다. 그 당시 ‘홀’에 대응하는 한계어는 ‘벌(伐)’ ‘부리(夫里)’였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 전기어인 ‘달(達)’ ‘매(買)’ ‘단(旦,呑)’이 한계어인 ‘뫼(山)’ ‘믈(水)’ ‘실(谷)’의 뜻으로 대응한다.

이처럼 백제어와 신라어는 계통적으로 다른 출발을 한 것이다. 설령 두 언어가 동일 기원이라 할지라도 황산벌 전투 때까지는 거의 700년 동안이나 서로 다른 언어발달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서로 몰라보게 다른 언어로 변천했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언어의 언어사적 배경과 어휘를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백제어와 신라어, 변천 과정도 달라

신라의 서울은 천 년 간이나 서라벌에 고정돼 있었다. 그래서 천도로 인한 언어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백제는 천도로 인해 ‘위례홀→한홀→고마(현 公州)→소부리(현 扶餘)’와 같이 언어권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여러 번의 천도에 따른 언어 변화는 백제로서는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신라어가 중앙어를 서라벌에 고정시켜 천 년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일 만큼 백제는 천도에 따른 언어 변화의 격동을 겪어야 했다. 그 변화의 특징에 따라서 백제어는 전ㆍ중ㆍ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어의 특징 ● 초기의 ‘위례홀어’는 부여계의 단일 언어였다. 따라서 전기 백제어의 특징은 단일 부족국가에 의하여 쓰여진 부여계어의 단일 언어사회라는 점에 있다.

중기어의 특징 ● 신라어에 비해 백제어가 아주 다르게 형성된 시기이다.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꿨다. 이 시기에 백제어는 남부와 북부 사이에 이질적인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마한 흡수의 영토 확장으로 말미암아 부여어+마한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로 바뀐 것이다.

후기어의 특징 ● 후기는 웅진(熊津) 시대(475)부터 막이 오른다. 이 시기에 백제는 영토의 상반신을 잃고 다시 단일 언어사회가 된다. 다만 다른 점은 후기의 단일 언어는 한계어라는 사실에 있다. 말하자면 “단일 언어(부여계)→복수 언어(부여계+한계)→단일 언어(한계)”로 변천한 것이다. 이 시기의 문화는 백제 문화를 대표할 만큼 찬란했다. 문화의 발달은 매개체인 언어의 발달을 수반한다. 아마도 지배층만은 여전히 복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위와 같이 백제어사와 신라어사는 변천 과정이 서로 다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황산벌 전투 당시의 언어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백제어와 신라어의 단어를 비교하면 상호간의 같고 다른 관계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백제인은 왕을 ‘어라하ㆍ건길지’라 불렀다. ‘어라하’는 지배층이, ‘건길지’는 토착인들이 사용했다. 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언어가 달랐던 사실을 예증하는 단서이다. ‘어라+하’의 ‘하’는 신라어의 ‘간ㆍ한’과 같은 말인데 ‘ㄴ’의 유무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건+길지’의 ‘길지’는 중세국어 ‘긔(王)’로 계승됐다. 백제 후기어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님:’이 된 것이다. 현대어 ‘-님:’(선생님)과 ‘님:’(님이시여!)으로 쓰인다. 신라인은 왕을 ‘거서한, 니사금, 한’이라 불렀다. 전기에는 ‘거서한, 니사금’이 쓰이다가 중기 이후부터 ‘ 한’이 쓰였다. 이처럼 왕의 호칭이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백제어 ‘바혜’가 신라어는 ‘고개’로 다르게 쓰였다. 또한 신라어 ‘바달’이 백제어 ‘나미(內米)’로, ‘솔’이 ‘부사’로 달리 쓰였다. 수사체계도 신라어 ‘셋, 다섯, 일곱, 열’이 백제어 ‘밀(三), 우ㅊ(五), 나는(七), 덕(十)’과 같이 달랐다. 마한 54국명 중에 ‘비리(卑離)’가 무려 여덟 번이나 나타난다. 그런데 이 ‘비리’는 백제어 ‘부리(夫里)’로 계승됐다. ‘소부리(부여)’를 비롯해 무려 열 번이나 나타난다. 공교롭게도 그 수가 ‘비리’와 거의 비슷하다. 이 ‘부리’는 신라어 ‘벌’에 해당한다. 공주의 옛 이름 ‘고마나리’의 ‘고마’는 북(北)ㆍ후(後)의 뜻이다. 이 단어에 대한 신라어는 ‘뒤’이다. 백제어는 진(津)ㆍ천(川)의 뜻이 ‘나리’인데, 신라어는 ‘나~내’이다. ‘일본서기’에 ‘구마나리(久麻那利)’로 나온다. 백제어의 ‘나리’가 신라어 ‘내’로 줄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어 ‘소부리’=신라어 ‘셔벌’=현대어 ‘서울’

‘소부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이름이다. ‘소’는 ‘동쪽’이란 뜻이고 ‘부리’는 ‘벌판’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소부리’는 ‘동쪽벌판’이란 뜻이 된다. 이 말은 신라어 ‘사벌(沙伐)’ ‘셔벌(徐伐)’과 같은 말이다. 이 말이 변해서 오늘의 ‘서울’이 됐다. ‘부리’가 줄어 ‘벌’이 된 것이니 ‘소부리’가 ‘사벌’ 또는 ‘셔벌’보다 이른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어는 ‘대(大)’의 뜻이 ‘한ㆍ근’(>큰)이었다. ‘한홀, 한산, 건길지, 근초고왕, 근구수왕, 근개루왕’의 ‘한ㆍ건ㆍ근’을 예로 들 수 있다. 신라어도 ‘한지부, 한나마, 한아찬’의 ‘한’을 썼다. 백제어는 송(松)의 뜻이 ‘부소ㆍ부’였는데 신라어는 ‘솔’이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언어사와 단어의 비교로 백제어와 신라어의 이동성(異同性)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백제어는 부여계의 단일 언어로 출발하여 중기에 이르러 마한어까지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이뤘던 것이다. 그러나 국토의 상반신을 빼앗기게 되자 부여계 언어 지역을 상실하고 다시 한계어를 사용하는 단일 언어권이 됐다. 하지만 마한이 망한 후 거의 400년이나 지났고 거기에다 언어의 계층으로 보아 왕족을 비롯한 상류층은 여전히 웅진 천도 이전의 언어 즉 한홀(漢忽)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배층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아마도 백제 말기의 언어는 웅진ㆍ소부리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 언어가 표준어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만 수도권의 언어라 할지라도 지배층의 언어와 피지배층의 언어가 달랐을 것이다.

계백 장군은 수도어인 소부리어를 사용했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지배층의 언어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김유신 장군은 서라벌어를 썼을 것이다. 황산벌 전투를 치를 당시는 백제어와 신라어가 700년 동안이나 서로 다르게 발달한 단계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유로운 언어소통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단일 언어의 현대적 편견 때문에 1343년 전의 언어까지 단일했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현대국어가 완전한 단일어인데도 불구하고 불과 분단 50년 만에 남북의 언어가 상당히 달라진 현실을 감안하면 짐작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