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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Clothes]

imaginerNZ 2008. 3. 27. 05:02

           나체의 군상 -기네스 북 기록

 

 

옷[Clothes]


나는 요즘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것이 싫고 천성적으로 수줍음이 많아 혼자서 그런 장소에 가서 쇼핑을 하는 것이 웬지 모르게 처량하고 궁상맞아 보이는 탓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시간을 잊고 살며 삶의 시간은 빨라진다. 젊은 시절에 나이 드신 분들이 '늙으면 세월이 유수 같다.' 고 하시던 말씀들을 어느덧 체감하는 나이가 되었다.] 설령 매장에 들어선다 해도 성격이 예민하면서 우유부단한 탓에 물건을 좀처럼 고르지 못하고 계속 망설인다. 기능적인 필요성을 기준으로 옷을 고르기만 하면 그만인데, 거기에 자꾸만 이상적인 미학이 가미되기 때문이다. 마치 떡방아간에 가서 가래떡의 색감이나 모양과 길이를 따지고 고르려는 겪이다. 쇼핑을 할 때는 미리 상상력을 제한하여 결정을 내린 후에 쇼핑을 해야지 현장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금물이다. 현장의 상상력은 불필요한 충동구매나 과잉구매 또는 비효율적인 구매가 되기 십상이다.

 

계절에 한 벌 정도면 그럭저럭 지냈는데 세월이 흘러 그 계절 대표복장의 수명이 다하여 옷이 필요하였기에 백화점에 몇 번 들렀던 적이 있다. 시장에 가지 않고 백화점에 가는 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백화점은 대로변이나 거리에서 잘 보이고 표지판도 교통의 요충에 여기저기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찾기 쉬우나 시장은 표지판도 별로 없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내 나름대로의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비 사회적이고 다만 게으른 천성이 있을 뿐이다. 어느날엔가는 결국 미루고 미루다 게으름을 떨쳐 내고 어색함과 난감함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혼자서 가게 된다. 백화점 입장은 내게 부담과 용기를 맞바꾸는 일이다.

 

어렸을 적에는 사람들이 옷을 개조하거나 수선해서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요즘 사람들은 웬만하면 버리고 새로 사서 입는 습속이 일반화 되어 있다. 대충 꿰매고 수선해서 입으면 됐지 하는 마음에 이렇게 변화한 풍속이 어떨 때는 떨떠름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때로는 현대물질문명의 과잉소비를 명분 있게 흠잡는 심리도 생긴다. 위에서 말한 나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분석하고 종합한 결과로 나는 반영구적인 사전구매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 내용인즉슨 첫째로, 속전속결로 30분 이내에 쇼핑을 끝낸다. 둘째로, 계절과 기능을 미리 결정한다. 무엇보다도 기능이 중요하므로 모양이나 색깔은 현장에서 결정한다. 모양과 색상이 실험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양한 여성복에 비해 남성복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차라리 제복에 가까울 정도로 일정한 틀이 있다. 남성복의 패션은 색깔은 거기에서 거기고 다만 실루엣과 질감에 변화가 가미되는 것이 주조인 듯하다. 남성복은 정해진 관습적인 틀의 범위 안에서만 다양성과 변화가 허용된다는 느낌이 강하다. 또한 한국남성들의 체형과 신체적 색상이 비교적 심플하다는 점도 일조하는 듯하다. [서구인들은 머리칼과 두상과 얼굴과 체형에 따른 색상과 형태의 조합이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면 머리칼의 색상과 올의 형태와 눈색깔과 키와 체형을 고려하여 복장을 조화시키는 방법이 다양하다.] 그래서 백화점 매장에 가보면 남성복 코너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드리워져 있다. 남성복은 자본주의의 포교사들 복장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전에 어쩌다 남성복을 쇼핑한 후에는 눈씻김으로 형태와 색깔과 질감이 다채로운 여성복 매장을 한 바퀴 돌아 나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남성복의 기능은 비교적 단순하므로 정장인지 스웨터인지 바지인지 고르면 되고, 색깔의 스펙트럼의 범위가 정해져 있으니 현장에서 선택하는 것이 큰 수고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셋째로, 가격대를 정한다. 정장은 30만 원대로 한다. 선을 약간 넘을 수는 있다. 단, 세일기간은 피한다. 세일품목은 나의 어리숙한 눈매에도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티가 나고 옷끝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맵시가 없다. 그리고 신체의 각 부분이 옷의 뻣뻣한 각에 맞추어지는 느낌이 들고 오래 입어보면 후줄근해지거나 마침내는 고집스레 각만 남거나 고장(!)나는 옷들도 더러 있다는 체험 때문이다. 그리고 순모재킷이나 순면 등 '순~'자가 있는 옷은 사지 않는다. 빨리 늘어지고 빨리 닳는다. 기타 꼭 필요한 평상복은 별로 구매했던 기억도 없지만 비싸면 사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어떤 때에는 갑작스런 실험정신의 돌발로 거금을 투척하고 샀으나 입고 외출을 한 번도 하지 않게 되는 코트를 덜컥 사 버린다. 그런 옷을 사고나면 마치 어렵사리 비싼 미술품이라도 한 점 산 듯 기분이 뿌듯하고 세상이 우후의 상록함에 젖어 있는 듯 상쾌해 보인다. 그러나 그 옷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자신이 영원히 착용되지 않을 비운을 타고난 것임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수상한 주인을 만난 탓이다.  그런 경우에 나는 옷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낀다. 청결하고 신선한 옷의 신세를 세상 구경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터인데, 시초부터 신세를 망쳐 놨으니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자꾸 그 옷과 시선을 마주하기를 피하다 마침내 옷장에 넣고 만다. 그렇다고 바꾸러 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다음에 버티고 버티던 둑이 또 터져야만 나는 백화점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엾은 친구가 옷장에 갇힌 수도승 친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어떡하랴? 서로 가까이 할 수는 없으면서도 결코 멀리 할 수 없는 친구를 만났으니.

 

또 어떤 때에는 단벌 계절옷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가 방 한 구석에  흉물(!)처럼 아니 그것이 없으면 내 방이 아니라 남의 방에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며 황급히 돌아 서게 될 정도로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제자리를 잡고 있어 차라리 장식화 되어버린 동지(?)를 떠올린다. 집안에 모든 가구가 갑자기 증발해 버려도 나는 내 방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내 방에는 내 방만의 어둠과 내 방만의 빛의 운행이 어려 있고 그 안에 내 정신의 온갖 편력과 천편일률적이고 판에 박힌 세상살이의 쳇바퀴에서 벗어난 안온한 게으름이 포근히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지의 문제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엄지발가락 부분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검은 외짝 양말이 바로 내 방의 유일한 동지다. 그 동거자를 난데없이 떠올리고는 우선순위의 카드를 바로 바꾸고 옷보다 더 시급한 양말 10켤레를 사들고 백화점을 휑하니 나선다. 그렇다고 나는 그 말없고 착한 동지를 버리고 젊은 양말들과 바람이나 피울 만큼 야속하거나 염치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 외짝의 검은 동지는 머리를 비운 채 자신의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나의 외롭고 검은 동지를 한 번 차분히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내가 신는 양말들의 색깔은 오로지 00000(black) 계열이다. 나는 원래 블랙 계열의 착용을 좋아하지 않지만 무조건하고 000000(black)이나 혹은 짙은 회색의 착용물만 산다. 때를 타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언제, 어디에 입고 가든 신경 쓸 일이 없고 게다가 무계절의 복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고난 수줍음에 자의식을 발동하지 않기 위함이고 또한 타고난 게으름에도 무리없이 걸맞다. [내 감정의 쌍두마차는 수줍음과 게으름이다.]나의 패션은 그게 유일하다. 검정 실루엣의 패션이라고나 할까? 겨울에 검정 춘추복을 걸치고 다니면 남이 보기에 불쌍하게 추워 보이지 않고 설령 추워도 내게는 더운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고 정신에 빳빳한 서릿발이 들어 좋다. 날씨가 엄동설한이 되면 거기에 검정 외투를 걸치면 그만이다. 마찬가지로 여름에 검정 춘추복이나 춘하복을 입고 안에 하얀 셔츠만 받쳐 입으면 시원해 보이면서 내면은 열정에 끓어 올라서 그 역시 마음에 맞다. 그런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 상태로 땡볕에 반 시간만 서 있으면 예술적인 완성도는 차치하고, 자연스런 발로가 아니라 상황의 요구에 의해 열정이 끓어 오르면서 제법 고독한 고뇌에 휩싸인 글이 수십 편은 족히 나올 듯하다.

 

헌데 요즘 들어서 변화무쌍한 현대패션의 추세에 발(!)맞추어 내게 중대한 패션의 변화가 생겼다. 옷에 차츰 무늬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선폭이 넓지 않아 선의 순수를 간직한 줄무늬가 바로 그거다. 무늬의 출발점은 기하학적으로 점, 선, 원 등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검정색은 하얀 바탕에 수없이 많은 점이 빈틈없이 빼곡히 그려져 있는 것이니, 이미 점의 패션은 정복을 했고 이제 선의 단계에 도달했나 보다 하는 느낌이 든다. 검정색도 드디어 진화하는구나! 라고 내심 여기며.

 

이제 남은 무늬는 원이 아닌가 싶다. 원의 안은 원래 비어 있다. 그러면 하얗게 표백한 무명 옷 한 벌을 구해 입으면 어떨까 싶다. 하지만 백구두는 절대로 No! 하얀 고무신은 ok!다. 하얀색을,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원내의 일부라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모든 색을 반사하여 텅 비어 있는 것, 모든 패션의 바탕, 그런 생각을 하고 하얀 옷을 입으면 내 심신 속이 투명하게 다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을 듯 싶다. 하얀 바탕이 없이는 예술이 불가능할 거라는 다소 과한 생각이 때로 예술가의 긍지에 보탬이 되겠다는 덜 된 생각도 곁들여 본다.

 

하여튼 겨우 몸에나 걸치는 옷을 사러 팔자에 없는 으리번쩍한 백화점에 드나드는 모험을 감행해야 하는 나 자신이 청승맞게 여겨진다. 마치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구석이 있는 둑이 늘어가는 물의 무게를 버티고 버티다 마침내 무너져 내리듯 옷의 구매를 감행해야 한다는 현실에 마음이 서글퍼진다. 먼 옛날에 원시의 조상들이 아무것도 걸치지 �은 천둥벌거숭이로 거리낌없이 눈치 살피지 않고 마음껏 산야를 돌아 다닐 수 있었으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치장을 하고 나서 남의 이목으로 거울을 통해 자신을 평가하기를 수 차례 하고나서 호텔 커피숍에서 이성을 만나지도 않았을 거라는 역사적 사실이 부럽기만 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는 세월 따라 나의 동지가 되다시피 한 옷이 늙으면 늦바람난 남정네가 조강지처를 하루 아침에 차버리고 어린 여인네 품에 가 안기듯이 젊고 싱싱한 옷을 구하러 참마음에서 먼 곳을 향해 몸의 치장을 위해 불원천리하고 찾아가야만 한다. 그것은 기실 마음에 반드시 필요한 일은 아니나, 사회적인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기 위해 옷이라는 껍질을 걸쳐야 하는 일이니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거기에다 한 꺼풀이 아니라 최소한 두 꺼풀 이상 정도는 걸쳐야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는다는 법적인 판정을 받는다.만일 한꺼풀-예를 들어 투피스 속옷-만 걸쳐도 매스컴에 나거나 정신요양원 신세를 질 수도 있다.] 다만 바라는 점은, 남성복도 차제에 투피스가 아니라 팬티 한 장이나 아니면 투피스 속옷 정도만  걸친 위에 로마인의 토가나 인도여성의 사리처럼 천 하나로 간편하게 몸을 휘휘 감고 다닐 수 있는 원피스 복장이 내가 죽기 전에 한 번쯤 유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기왕이면 이 사람이 소망하는 원적(圓寂)함에 깃든 하얀 패션으로 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끝으로 웬만한 사람의 정을 넘어서는 동지인 구멍 뚫린 양말의 이데아와 옷장 속에서 세상에 대한 동경을 넘어서서 저홀로 도를 닦고 있을 친구인 구도승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전한다.

(200803270422 기작성 이메일의 1차 추가정리, 엘리엇 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