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씨 부부(the Ravens)
레이븐씨 부부(the Ravens)
번잡한 오클랜드 시내에서 북쪽으로 하버브리지를 건너 뉴질랜드의 바닷가 마을인 밀포드에 정착하였을 때 대자연 속에서 사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마음결에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 사연이 생겼다.
이사하고 나서 얼마 후에 *`Blue Sky`라 이름 짓게 된, 내가 입주한 집은 기초가 되는 골목(骨木)으로 집의 형체를 갖춘 후에 가로지른 널판자의 윗부분을 살짝 겹치듯이 붙이고 또 그런 식으로 붙이고 하여 사방의 외벽을 완성했고 그 외벽의 아랫단은 검정에 가까운 회색 칠이 집을 빙 두르고 있고 나머지 윗부분은 온통 순백의 하얀색이다. 지붕이 편평한 집으로 언덕의 경사면 중간에 위치하여 아래에 집 한 채와 윗집 한 채(레이븐씨 댁)가 있다. 사각형의 기본적인 집들에서 오른쪽 부분이 바다방향으로 툭 튀어 나와 있어 거기에 바다전망이 있는 안방(sea-view room)이 위치하고 그 바로 앞부분에 나지막이 주석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있는 차고가 있고 그 왼쪽 나머지 부분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빙 둘러 집 뒤쪽에 있는 자그마한 잔디터까지 정원이 이어져 있다.
전면의 sea-view room에서 바라보면 잔디밭 사이 해안도로와, 바다와 작은 강이 만나는 횡단선의 운하가 있고 거기에 요트클럽하우스와 각종 요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 운하(creek) 건너 밀포드(Milford) 리저브(Reserve는 건축이 유보된 작은 공원)의 여기저기 높다란 고목나무들 아래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고 이 리저브에 이어 길고 긴 밀포드 비치가 펼쳐져 있고, 바다건너 수평선에 닿을 듯 경사가 완만한 아스피데식 화산섬인 랭기토토섬이 떠 있다. 오른 쪽으로 아슴하게 멀리 칼날반도인 버클랜즈 반도(골프장이 있고 그 끝 곶에 전망대가 있다)와 그 앞 바다에 떠 있는 조그만 섬 브라운스 아일랜드(노오란 금빛 잔디로 덮여 있어 그렇게 불리는지 아니면 브라운스네 사람들이 살거나 소유해서 그 이름이 붙었는지 확실하지 않다.)도 보인다. 맨 오른쪽 육지에 있는 긴 언덕에는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각각의 전망을 확보하느라 마치 하늘을 향해 숨쉬기 시합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바다전망을 가진 sea-view room이 있는 집을 구하느라 시간과 돈이 조금 더 들긴 했지만 정말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윗집 레이븐씨의 부인인 Anne아줌마가 찾아와서 나와 첫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정원을 가꾸는 요령으로 화제가 바뀌었다. 나이가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약간 샌 듯한 연갈색 머릿결에 푸른 눈의 Anne아줌마는 필자에게 친절하고 자상하게 꽃이며 식물이름을 일일이 마치 사람을 소개하듯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 허나 몇 십 가지의 식물을 한꺼번에 다 기억할 수는 없어서 내친 김에 그 분께 혹시 뉴질랜드의 식물관련 책자가 있느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오라고 한다. 그래서 함께 레이븐씨 댁으로 갔더니 집안으로 친절하게 안내하면서 집구조와 거실의 전망과 뒤쪽에 있는 실내정원과 거실 오른쪽에 있는 빛나는 순백색의 방도 보여 주며 큰딸의 방인데 그녀가 일본어와 사진학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일본에서 사진작품활동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영어강사를 하고 있노라고 설명해 준다. 차 한 잔을 하겠느냐는 권유에 고맙다는 인사와 녹차면 좋겠다고 하자 끓여 내오며 뉴질랜드 식물도감과 딸의 사진작품집도 함께 건네며 얼마든지 천천히 돌려줘도 된다고 덧붙인다.
뉴질랜드 식물도감을 받아든 뿌듯함을 마음에 간직하고 딸의 작품집을 펼쳐 보았다. 그것은 어느 전시회에 출품했던 작품모음집으로 딸의 은사인 스위스인 작가와 베트남인, 중국인, 호주인, 뉴질랜드인 등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다. Anne아줌마 딸의 작품성향은 동양식 석등이며 연꽃이 피어 있는 못이나 어둠에 잠긴 길의 윤곽에 붉거나 푸른 네온관으로 장식을 주고, 서양의 날개 달린 수호천사상이나 십자가 등속의 성물은 푸른 또는 신비할 정도로 새하얗고 은은한 네온관으로 테를 두르거나 또는 나름대로 고리형 광배처리를 하는 것이 주조로 개성 있고 실험성이 강했다.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오며 밝고 맑은 환경에 살면서 동심의 순수성을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없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그 어떤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더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로도 내가 밤늦게 혹은 새벽녘까지 돌아다니거나 무얼 끄적이다 늦잠을 자다보면 아침에 내 집 정원의 화초에 누군가 `쏴아 쏴아`하고 물을 주는 소리에 잠이 깬다. sea-view room에서 두터운 비염(非染)의 무명커튼을 열어 정원을 보면 아침 늦잠에 물을 주지 못한 날이면 날마다, 과묵하고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해 보이는 레이븐씨가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에 물을 주고 있다. 미안한 마음에 얼른 정원으로 나서면, 인사를 나누고 하던 일-가지를 치고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낙엽을 모아 치우고 식물을 새로 심거나 옮겨 심는 일-을 계속하며 거의 다했다고 하며 아주 짧게 히죽 웃다 만다. 그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에 이는 미소라니! 그 미소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드러내지 않으려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 황급히 다시 제자리 깊숙이 숨어 버리는 그런 겸양의 미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븐씨 부부는 서로 너나없이 필자가 소홀히 남겨 두는 정원일은 틈나는 대로 어김없이, 말 한마디도 없이 조용히 다 해 놓는다.
어느 날인가 Anne아줌마와 우연히 만나 몇 마디 나누다 레이븐씨 얘기가 나왔는데 남편이 직장일 때문에 그런지 정원일에 가끔 게으름을 피운다고 핀잔을 주었다. 내가 보기에 레이븐씨는 정원일을 정말 열심히 한다. 그런에 그런 Anne 아주머니의 남편에 대한 불평 아닌 불평을 들었을 때 내 마음속에 부끄러운 듯 불그레하니 화사한 변종 Grandi flora[직역하면 `큰(그랜디) 꽃(플로라)`의 뜻으로 하얗고 거대한 목련(magnolia)의 일종이며 그 변종에 불그레한 꽃이 있다.]가 개화철을 잊고 순간에 피어나는 느낌이 든다.
그 후로는 이른 아침에 내가 직접 물을 주고 빌린 전정가위로 틈 나는 대로 가지치기를 하고 잡초를 뽑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원래 동물보다는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드디어는 잔디 깎는 기계로 웃자란 잔디를 깎고 각각의 화단에 나 있는 식물간의 균형을 유지하거나 옮길 식물은 옮기고 불필요하거나 과도하게 자란 식물은 솎아내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 동안 빌려 온 식물도감-당연히 정원용 도구는 Anne아줌마 집에서 아무거나 무시로 빌려 온다-도 틈나는 대로 읽고 실제 식물과 비교해 보고 책에 나와 있는 다른 변종도 유심히 공부하는 버릇이 생겼다. 마을의 길을 걷다가도 어느 집에 어떤 식물이 있나 보고 모르는 식물은 기억했다 다시 도감을 뒤적거려 이름과 식생에 관해 알게 되는 희열은 대단했다.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Anne아줌마는 필자가 하는 식물공부의 간접적인 스승이자 후원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친절과 배려와 양식의 스승, 마음씨의 스승이 된 것이다.
물론 Anne아줌마는 어떤 교화나 교정 또는 칭찬이나 지적인 과시 등등의 정신적인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나를 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뉴질랜드의 대자연에 감화되고 깊이 경도되어 거기에 몰입해 있던 나에게 자연으로부터 사람에게 눈을 돌리게 한 중요한 동기를 그야말로 털끝 하나까지 자연스럽게 이입을 해 준 분이 바로 레이븐씨 부부였던 것이다. 그 고마움을 필자는 평생 간직하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레이븐씨 부부가 가능한 오래도록 해로하시기를, 덕분에 넓어진 마음 속 깊이 기원한다. 오랜만에 편지를 한 통 보내드려야겠다. 요즘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이니 한국의 정서가 배어 있는 조촐한 선물도 하나 동봉하고.
*이 집에 기거하던 동안에 필자는 거의 대부분의 뉴질랜드 시편과 수필을 썼다. 아래에 그 목록을 남기고 그 아래에 `레이븐씨 부부`라는 시와 필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 집 `Blue Sky`를 떠나기 전에 쓴 시인 `빈 집(An Empty House)`을 수록한다.
1. 자연시편(About Nature)-10편
먼동이 트는 섬 랭기토토/수평선/자연방법선언/비(Rain)/밀포드해변의 파도/버클랜즈 비치/망가누이 연안의 케이블 만(Cable Bay in Manganui Coast)/레인 데이지(Rain daisy)/동일성/왕가파라오아반도의 비스타 모투 路(Vista Motu in the Whangaparaoa Peninsula)
2. About Myself-8편
그림자에게/나의 열정(My Passion)/그 눈동자(Those Eyes)/아마빛 머릿결(Flaxen Hair)/정황/햇님과의 대화( The Dialogue with the Sun)/하늘마음/Those Little Eyes(영어작품)
3. About Life-10편
고독/벌레/산가폐촌/새(Bird)/성공이 아닌 참행복을 바라는 모든 이에게/성(Sex)/너희들을 보면(`My` children)/베토벤-2(한국에서 쓴 첫 작품은 분실)/성(Castle)/To the bench of late Eric J. Stevens on Milford Beach
4. Modern Times -2편
유전공학/현대
5. New ones - 10편
석양(Glowing Sunset)/온달(A Full Moon)/The Purest Aches(영어작품)/An Egg(영어작품)/행복(Happiness Calm)/푸푸케 호수(Lake Pupuke)/마음의 창(Window of mind)/어둠 속의 춤/대화(Dialogue)/말은 침묵의 사이베리아
6. Poems-2 - 7편
밀포드의 밤거리/비파나무(Loquat)/성체(Holy Body)/제자/세상에 부치는 사과(An Apology to the World)/랭기토토섬-2/레이븐씨 부부(The Ravens)
7. 신작-1 - 3편
그리움이란/둥근 배아세포를 찌르는 주입바늘의 노래(미완성)/In a Dark Twinkle(영어작품)
8. 신작-7 - 7편
결국.../괴로운 기억 속에/네 마음이.../빈 집(An Empty House)/서기 2001년 5월 11일 아침 7시 15분 밀포드에서/악어의 평화(Crocodile's Peace)/그것은-(It's-)
9. Total Numbers Above - 57편
그 외 밀포드를 떠나 귀국하기 전 여행길에 오클랜드의 파넬, 북섬의 타우포와 남섬의 카이코우라, 크라이스트처치, 퀸스타운, 던스턴, 남알프스 산중, 호키티카, 쿡해협 등지에서 쓴 시편들이 있다.
레이븐씨 부부
조용한 미소
상냥한 태도
묵묵하고 온화한 마음씨
사람이 사람임을 입증하는
집과 정원에 그리움을 담아 가꾸며
자연이 자연임을 입증하는
하늘과 바다와 나무와 꽃의 자연을
탁자와 선반, 의자와 화분과 창문에 닿는 손길 하나하나에 담긴
정감과 애수 속에서
눈이 부시도록 하얀 빛 속에
중용의 분위기를 담아 가꾸는
아름다운 자연 속의
아름다운 손길에 담긴 마음씨
사람이 사람임을 입증하는
한 그루 나무가 나무이듯
한 마리 새가 새이듯
한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처럼
(파도의 침묵과 노래처럼)
자연이 자연임을 입증하는
눈이 부시도록 하얀 빛 속에
자연 속에 사람의 자연이 되어 사는 애틋한 부부.
∑. Translation
The Ravens(incomplete)
silent smiles
gentle attitudes
mute an' warm hearts
proving human is human
containing an' growing '*grium' in their house an' garden
proving nature is nature
in feelings an' sympathy
giving every touch of their fingers to the tables, shelves, flowerpots and windowsills
tending trees and flowers
containing the sky and the sea in their house an' garden
in brilliant white light
growing the mood of *meditation
beautiful mind in their handways in beautiful nature
proving human is human
as a tree is a tree
as a bird is a bird
like the clouds in the sky
(like the silence and sounds of the waves)
proving nature is nature
in brilliant white light
an affectionate couple is the nature of human in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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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um : a Korean word which can't be properly expressed in English. It's a kind of original nostalgia, an alienated feeling for whole things in the universe, because there is no way for them to be the center of the limitless universe. A great darkness in the universe can be called a shade of Grium.
*mediation : mediation between nature and artific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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