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와 일본
가야 계통의 한씨에 관해서 일본인들이 백제 계통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5세기 중엽에서 말까지 가야 지방의 생산 기술이 전래되었으나 6세기부터 백제계의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어서 새로 도래했다는 뜻에서 ‘금내한인’이라 불리었는데 한씨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씨는 함안의 아라가야의 이주민들이 마산만을 출발하여 대마도를 중간지점으로 하고 이끼섬을 거쳐 북구주에 도착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길비지방(히로시마)과 부중지방을 거쳐 대판에서 대화로 진출하였다. 이외에도 마산에서 서부출운(도군)을 통해 대판을 거쳐 대화로 진출한 길도 있었다. 이들이 왜지로 진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서와씨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한씨(야마토노 아야씨)의 강력한 경제적․군사적 힘과 소와씨와의 결탁에 의해 일본으로 진출하게 되고 아야씨는 대화왕정의 기술집단을 장악하여 정치군사적 배경을 이룬 강력한 문벌로 성장하였다. 일본땅에서는 대화왕조에 아야씨로 성장하여 비조 문화의 단서를 열 정도로 힘과 문화를 가진 함안의 나라국이었다. 고고학적 증거를 살펴보면 대화의 강원시 신택천총(니지와센총)무덤이 있는데 이것은 593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는 거대한 고분인데 그 가운데 126호분에서 금가락지, 귀걸이, 팔찌, 유리그릇, 거울, 보석 등 생활 부장품과 사신도가 발견이 되었다. 이러한 성격은 백제보다는 아라갸의 계통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이런 부장품의 성격이 의미하는 것은 이 지역은 아스카 시대 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호족인 아야씨 일족의 무덤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일본과 가야는 어떤 관계? 기원전 3세기로부터(미생시대) 기원후 7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에 백만 명의 이주민이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 그 이주민들이 어디에서 왔든 그들이 출발한 항구는 김해, 마산, 진도, 또는 하동 등 가야의 항만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일본의 건국사는 가야 출신 이주민들의 일본 열도 개척사인 것이다.(고령-대가야, 김해-본가야, 함안-아라가야, 보성-소가야) 현대 일본인의 80%가 고대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들이 BC3,4세기에 벼농사가 잘되는 땅을 찾아, 더 많은 철광석이 있는 곳으로 대한해협을 건넌 것은 이주민들이 도전정신과 모험심이 강한 족속이었음을 보여주고, 그 후손들이 오늘날 세계적 경제 대국을 건설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건너간 이주민들 중 대표적인 세력은 아라가야 사람들이다. 그 아라가야의 대표적 유물은 5세기에 제조된 불꽃무늬 토기인 것이다. 불꽃무늬 토기는 동그라미 위에 길쭉한 이등변삼각형이 이어진 모습이다. 이 토기의 대량 출토 지역은 함안과 그 주변지역인 창원, 마산, 의령, 진주의 일부이며 멀리는 김천, 거창, 경주, 부산, 일본의 근기지방 등이다. 근기지방은 대판, 경도, 대화, 나라로 옛날 일본 수도권 지역이다. 5세기 불꽃무늬 토기는 첫 번째로 6대유적에서 나오고, 포류유적, 구보사 유적, 영의궁에서 나온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를 통해 학계에 보고된 것은 약 150여점인데 그 가운데 함안 지역에서 100여점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지역 가운데 토기의 출토 양상으로 보아 함안과 그 주변지역인 창원, 마산, 의령, 진주 일부는 아라가야의 직접적인 영역이었으며 그 밖은 아라가야와 교류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은 왜와는 바다를 건너 진동, 마산만을 통해 교류했다. 아라가야의 유물과 아라가야의 유적은 북구주와 근기 지방을 이어주는 세토네(뇌호내해)연안을 거쳐 중구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아라가야식 토기와 산성, 가야신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신사도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역사성이 있어서 아야씨를 가야계통으로 보는 것이지, 6세기의 백제인의 일본진출로 ‘금내한인’에서 오는 백제계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반도의 도래 물결은 AD8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으나 이 무렵부터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주민을 싫어해서 이주민들을 동북지방 등 미개지로 보내고, 끝내는 입국을 막고 추방을 시키며 당나라, 외부 나라와의 차단을 하여 국풍 문화의 전파를 더욱더 촉진시켰다. 국풍문화? 10세기 이후부터 시작해서 12세기 무렵의 문화를 말하는데 일명 등원문화(후지와라)라고도 부른다. 등원시는 나라시대의 실권자이자 그 이후에도 일본을 이끈 시가 등원시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894년(9세기말)에 대화 왕조에서 당나라로 보낸 사신 견당사 파견이 중지되자 먼저 도입되어 있던 당나라의 문화를 일본의 고유문화에 동화시켜서 일본적 색채가 깊은 문호로 만들었다. 이 문화는 나라시대, 평안시대보다 역동적인 면은 없으나,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미적인 감각에서 특징이 있는 문화이다. 국풍문화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본인들은 가나문자를 만들이 일본인의 강점을 자유롭게 표현함으로써 일본의 국문학이 융성하고, 일본의 풍물을 그리는 대화회(그림)가 발달하게 되었다. 불교를 보면 말법사상을 배경으로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아미타불에게 의지하는 정토교 신앙이 널리 퍼지고 미술에서도 정토교와 같은 작품이 나왔다. [말법 사상 : 불교에서는 시대 구분을 세가지로 하고 있다. 첫 번째가 정법 시대로 불교에서 가장 성했던 초창기부터 500년에서 천년까지를 이른다. 두 번째는 상법 시대로 정법후 천 년 동안의 불법 시대이다. 석가가 설교한 법은 있으나 신앙이 형식화되어 불상, 탑, 절 등 건축물을 건축해서 진행되던 시대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법 시대는 상법이 지나고 나중에 오는 약 1만년 간의 시대로 불교가 가장 퇴폐하는 시대이다.] 이런 현상이 나오는 이유는 도래계의 씨족들이 9세기 말 역사의 표면에서 멀어지고, 율령 체계속에서 몇 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주민계라는 의식이 희박해지고, 외국문화인 한반도, 당나라 문화에서 자기 일본의 문화로 관심이 옮겨져 간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때 국풍문화에서 눈에 띄는 것이 가나의 탄생이다. 가나는 그 전에는 일본어를 표현하기 위해서 만요가나가 사용되었으나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사용이 안되다가 9세기경 가나가 고안이 되어 10세초에 거의 형태가 정해진 것이다. 이리하여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가타카나는 불충문한 약체이고, 일본음으로 표현할 한자의 한 부분을 따서 표음화한 것이다. 한자를 많이 하는 학자가 승려들이 사용하였다. 히라가나는 한자의 초서체를 흘려서 간소화한 것인데, 여자들이 주로 사용해서 ‘여수초가명’이라고 불렸다. 한문 사용을 기피한 여성 귀족들에게 씌여져 많은 여류 문학 작가를 만들었다. 이때의 여인들은 공식적인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음으로, 당시 정치 현장에서 사용되는 한자를 필요성이 없었다. 때문에 보다 쉬운 히라가나를 사용해 자신들의 의사를 문장으로 표현함으로써 훌륭한 문학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가나문학 작품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씌여졌다고 인정되는 ‘죽취물어’이다. 이 작품은 동화처럼 재미있는 가운데 귀족들에 대한 냉혹한 비판이 깃들여져 있는 작품이며, 일본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죽취물어는 가나문자로 쓴 최초의 이야기인데, 상하권으로 되어있고 901년에 완성되었다. 내용은 대나무를 채취하는 노인이 대나무 숲속에서 발견한 가구야히메가 성장하는 과정과 커서는 귀공자들로부터 청혼을 받고 나중에는 천황의 부름을 받으면서도 그에 응하지 않고 승천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달 속에 불로불사의 장생할 수 있는 세계가 있고, 영원한 생명을 동경하는 신선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의 한서와 볍화경에도 조예가 깊은 지식인이 민간전승을 목적으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문으로부터 일본어가 생겼으나 한문은 원래 한반도에서 전래되어 이두식 표기법과 백제와 신라의 토를 본받아오다가 가나문자의 완성으로 비로소 문자를 갖게 된 것이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현재의 형태로 통일된 것은 1900년에 소학교령을 공포하여 표준자체 48자를 제정하면서 부터이다. 이러한 문화를 바탕으로 우리가 한 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이를 모태로 탄생된 일본 우익의 문제이다. 일본의 고유 정신을 살려야 한다며 1881년 교지사란 단체를 만들어 현양사로 이름을 바꾼다. 이들은 여러 우익단체를 낳고 아시아 침략의 성명이 되었다. 일본 복강 인근의 신사에는 약 1m20cm의 일본도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란 글이 적혀 있다. 이는 ‘한 순간에 빠르게 붉은 여우를 찔렀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노호는 명성황후를 가르키는 말이다. 이 칼로 국모를 시해한 등승현(도카스아키)역시 현양사 소속이다. 이들은 갑신정변에 개입했고, 김옥균, 박영효등을 일본에 숨기기도 하고 특히 전봉준 중심의 동학농민운동때는 천우협이란 단체로 가담하는 등 일본의 우익단체는 우리 근대사 곳곳에 어두운 흔적을 남겼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맥아더 군정에 의해 현양사 등은 해체되면서도 우익단체의 좌명은 꾸준히 일본정계에 영향을 끼쳐왔다. 최근의 모리요시로 전 총리도 우익 단체 간부와 자주 술자리를 가져 물의를 빚기도 하였으며, 사토 에이사쿠, 나가소네 야스히로 등은 우익 단체 회원의 조언을 들어가며 정치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황중심주의, 국수주의, 현상타파, 상무정신등은 지금도 우익 단체의 핵심 강령이다. 2004년 일본사도회란 우익 단체가 독도상륙을 노리며 출항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사국지방의 작은 단체로 업신여기고 야쿠자와 같다고 하여 우습게 봐선 안된다. 일본의 우익단체는 스스로 천 여 개의 단체의 20만이 넘는 회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나 규모가 아니라 일본 우익이 역사적으로 일본이란 나라 심해저에 무슨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가를 먼저 보여주는 지표의 구실을 해왔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독도 상륙을 외치는 일본사도의 등 너머에 무엇이 꿈틀대는지를 다뤄봐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일본외무성의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견해인 것이다. 이 발표는우리에게 만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2005년 3월 16일 도군현의 지자제가 다케시마(독도)는 일본 고유의 땅이라고 의결한 것은 한국과의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은 2006년 독도 근처의 해저 수로 측량을 하겠다면서 이 지역을 국제적인 분쟁지역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약 110년 전 1895년 10월 7일 등승현 등을 비롯한 60여명의 정치 깡패가 경복궁 옥호를 마당으로 명성황후를 끌어내어 짓밟고 칼로 찌르고 불에 태워버린 을미사변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것이다. 힘이 없으면 언제 능욕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리의 지정학적인 운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력을 배양하고, 체제를 강화시키고, 국민간의 결속강화와, 정신문화적인 정체성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보면, 일본은 평안시대 초기는 귀족들이 당나라 문화를 즐기고, 9세기 말에는 당나라의 영향이 약해져 견당사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들이 견수사, 견당사를 파견한 목적을 살펴보면, 일본은 견수사 파견을 대개 600년부터 시작하여 614년까지 6회에 이르고 있다. 이때 견수사를 통해 일본은 불법을 융성시키고, 중국의 고도한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서 견수사를 보내었다. 견당사는 630년부터 894년까지 264년동안 12회에 걸쳐서 파견을 하였는데, 목적은 견수사와 마찬가지로 당의 훌륭한 문물과 제도의 학습과 도입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는 나라시대의 율령제도와 불교문화의 융성에 크게 기여했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이미 8세기에 내란을 겪고 난 뒤 계속 쇠퇴하던 때였다. 당현종은 천보시대(742-755)에 장기간 집권이 가져다 준 정신적 해이로(양귀비) 점차 정치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 안록산의 난과 사사명의 대란이 일어난 것이 755년 8세기 중엽이었다. 8년간 계속된 잡호 출신(국제적 혼혈인)인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은 당나라 제국의 붕괴와 함께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당송 5대의 혼란기를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중국이 허물어질 때 일본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고 동아시에 변화속에서 독자적인 성장을 거듭하던 일본은 중국의 문화 영향이 적어지자 교역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문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국풍문화이다.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가나문자이 발달이다. 또한 10-12세기 사이에 이르러 주거, 복장, 음식에 이르기까지 일본 특색이 두드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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